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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미래다]<65>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 보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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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18일 오후 3시. 청와대 회의실에서 과학기술처가 야심작으로 준비한 연구학원도시(현 대덕연구개발특구) 건설계획(안) 보고회가 열렸다. 전상근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현 삼전복지재단 이사장)과 권원기 종합계획관(전 과학기술처 차관)은 보고회 1시간 전 브리핑 차트를 들고 청와대 회의실에 도착해 막바지 보고 내용을 재점검했다.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청와대로 떠나는 전상근 실장에게 거듭 당부했다. “전 실장, 한국 과학기술의 명운(命運)이 걸린 일이요. 꼭 대통령 재가를 받도록 합시다.”

오후 3시가 다가오자 보고회 참석자들이 하나, 둘 청와대 회의실로 입장했다. 김종필 국무총리를 비롯해 태완선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남덕우 재무부 장관, 김현옥 내무부 장관, 민관식 문교부 장관, 이낙선 상공부 장관, 장예준 건설부 장관,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 청와대에서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소영 경제1수석 비시관이 차례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김병원 대통령 과학비서관(전 창원국가산단 이사장)과 권원기 종합계획관(전 과학기술처 차관)도 회의에 배석했다.

3시 정각. 박정희 대통령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박 대통령이 자리에 앉자 곧장 회의를 시작했다. 최형섭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간의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 경위를 간략하게 보고했다. “지난 1월 17일 과학기술처 연두순시 때 각하께서 지시한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에 대한 중간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전상근 종합기획실장이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에 대해 각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최형섭 장관의 소개가 끝나자 전상근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앞으로 나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준비한 차트를 한 장씩 넘기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브리핑 차트는 39장에 달했다. 전상근 실장은 연구학원도시 역할부터 입주할 기관, 외국 사례, 추진 경위, 건설 형태와 규모 등을 보고했다.

브리핑 순서는 △연구학원도시 구상 배경과 필요성 △연구학원도시 역할 △입주할 기관 △연구학원도시 외국 사례 △건설 추진 경위 △건설 형태와 규모 △연도별 계획 △입지 선정 기준 △후보지 △투자 규모와 재원 조달 방안 △사업추진 방식과 건의 사항 순이었다.

연구학원도시에 입주할 기관은 5대 전략산업(전자통신연구소, 선박연구소, 기계기술연구소, 해양개발연구소, 석유화학연구소) 연구기관과 국립연구기관(철도기술연구소, 국립표준시험소 등 12개 기관), 이공계 대학, 공동 이용시설(전자계산시설, 분석센터, 중앙도서관, 보수공작센터), 민간 연구기관 등으로 정했다.

연구학원도시 선정 기준은 △국토 중심부에 위치하고 △계획 면적 350만~500만평 부지 확보가 가능한 지역 △교통과 용수, 전력 등 도시 기반 조성 비용이 적게 들고 땅값이 싼 지역 △인근 농지 피해를 피할 수 있는 지역 등이었다. 과학기술처가 이런 기준에 따라 연구학원도시 건설 후보지로 엄선한 지역은 3곳이었다. 충남 대덕군(유성, 화동, 구측면) 일대와 경기 화성(팔탄면) 일대, 충북 청원(강내, 강서, 남이면) 일대 등이었다. 충남 대덕은 영남과 호남, 그리고 수도권 교통 중심지라는 점이, 경기화성은 수도권과 가깝다는 점, 충북 청원은 전국 교통의 중심지라는 점이 후보지로 선정한 이유였다.

과학기술처는 연구학원도시 건설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기획과 조정업무를 담당할 기획단을 구성, 운영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또 단지 건설을 전담할 건설전담기관을 설치하며 연구학원도시 육성법(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과학기술처는 △연구학원도시 건설은 국가계획사업으로 확정하고 1차 연도 소요 비용을 1974년도 예산부터 반영하며 △도시 건설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기획조정단'을 구성하고 △도시건설 후보지를 조속히 결정하고 기준 지가고시(地價告示) 등 각종 필요한 행정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브리핑 자료는 보고자인 전상근 실장이 직접 작성했고 보고 내용은 수 차례 연습을 통해 완벽하게 준비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대통령 보고회는 마치 물 흐르듯 일사천리로 매끄럽게 끝냈다. 브리핑을 하는 동안 회의실은 물을 끼얹은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40여분 브리핑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추진 방식과 도시 후보지 등을 놓고 참석자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눴다. 박 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통령=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때는 어떻게 진행했나요? ◇건설부 장관=경제기획원에서 구상해 특별법을 제정해 추진했습니다. ◇과학기술처 장관=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위해 경주 관광종합개발 추진 사례에 따라 청와대 중심으로 기획단을 구성하고 건설은 건설부에서 주관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부총리=경주 관광종합개발은 청와대가 마스터플랜을 작성하고 건설공사는 건설단이 한 것으로 압니다. 청와대도 일이 많은 데 모든 것을 청와대로 미루면 곤란합니다. 따라서 계획은 과학기술처나 총리실에서 마련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건설에 필요한 특별법 마련은 필요합니다.

◇대통령=청와대는 일이 많으니 과학기술처에서 서울대학교 건설본부와 같이 건설본부를 만들어 추진, 감독하는 것이 좋겠소. 계획은 총리실 혹은 관계기관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수립하고 끝나면 해산하면 됩니다. 이 연구학원도시 건설 공사는 공공시설부터 착수하고 연구소 이전은 차순위로 하는 것이 좋겠소. ◇국무총리=연구학원도시 계획 수립과 건설은 과학기술처에서 주관하고 관계부처 간 업무조정을 총리실에서 담당하겠습니다. ◇부총리=예산은 관계부처 실무자와 협의해 편성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도시 부지 확보를 위해 우선 100만평만 구입한다면 낙동강 유역 매립지에도 적합한 후보지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과학기술처 장관=우수한 두뇌를 한곳에 쉽게 유치하려면 연구학원도시를 서울 대전 이남에 건설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또 공업 용지나 농업 용지는 연구학원도시 건설지역 선정에서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무총리=3개 후보지 중 대덕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화성은 방송시설 관계로 곤란하고 청원 또한 군사시설이 들어섭니다. (이에 더해 김종필 국무총리는 “대덕은 유성온천이 있어 더 좋겠다”고 말해 회의장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대통령=항공사진을 보니 대덕이 좋을 것 같던데. ◇내무부 장관=도시 규모가 400만평 정도면 입주 인구는 15만~20만명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대통령=연구학원도시 건설이 목적이므로 인구 규모는 그 다음에 정할 일입니다. 따라서 입지 예정지에 꼭 필요한 부지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그린벨트로 지정했다가 나중에 필요시 이를 해제하면 어떻겠소. ◇부총리=입주 예정지를 기준 지가고시 조치로 확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린벨트를 자주 해제하면 곤란합니다. ◇건설부 장관=입주 예정지는 지가고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건설부 장관이 이어 건설 예정지역에 대한 지형과 지가고지에 대해 설명.) ◇대통령=연구학원도시에 필요한 부지는 지가고시 조치하고, 인근 지역 지가 상승을 막기 위해 주변에도 적절한 선에서 지가고시 조치를 취하시오. 다만 기존 도시 주변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를 위해 관계부처에서 현지 답사를 해야 합니다. ◇문교부 장관=정부가 연구학원도시를 대덕으로 결정하면 충남대학교를 이주할 계획입니다. 또 유치원을 비롯한 초·중등 교육기관 설립을 구상하겠습니다. ◇과학기술처 장관=종합계획서 작성시 이런 내용을 고려하겠습니다.

이날 보고한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은 대외비로 분류했다. 참석자들에게 배포했던 자료는 전량 회수했다. 국무총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회의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지 못하도록 입단속을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연구학원도시 건설 지역으로 충남 대덕을 최종 확정했다. 또 과학기술처에 연구도시 건설본부를 설치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연구학원도시 구상이 마침내 실현의 길로 한발 다가선 것이다.

이현덕 대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