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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단상]국제표준계 풍향이 바뀌고 있다

이희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이희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지난 9월 말 국제기술표준계 동향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선거가 있었다. 세계 통신 표준을 정하는 유엔전문기구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서 미국 도린 보그단-마틴 후보가 러시아 후보를 압도적인 표 차로 제치고 선출됐다. 그보다 일주일 앞서 치러진 국제표준화기구(ISO) 선거에서는 조성환 현대모비스 대표가 중국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ISO 선거 결과는 더욱 극적이다. 이겨도 신승(辛勝)일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거의 두 배에 가까운 표 차로 이겼다.

두 국제표준기구에서 미국과 한국 후보자 당선은 각 기구 또는 해당 국가 차원 의미를 넘어선다. 중국은 지난 20년 가까운 기간동안 국제표준화를 세계 전략 일환으로 삼고 특히 정보통신기술(ICT) 표준에 적극 참여해 왔다. 국제표준화는 일대일로 전략 한 축이기도 하다. 그 결실 중 하나가 5G에서 미국을 제친 것이다. 5G를 둘러싼 분쟁에는 보안 문제도 있었지만 중국이 5G 기술표준화를 주도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기술표준을 주도하는 것이 미래 기술발전 궤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미국이 다시 고삐를 잡으려는 계기가 됐다.

국제표준화 노력은 기술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 의미를 갖는 활동도 포함한다. ITU는 지난 8년 동안 중국인 훌린 자오가 이끌었다. ITU, ISO와 더불어 3대 국제표준화기구인 국제전기전자위원회(IEC) 회장도 현재 중국인이다. 특히 ITU 선거는 인터넷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선거로 여겨졌다. 시민사회, 개발자, 소비자 등 다수 이해관계자가 참여하고 상대적으로 집중화되지 않은 인터넷 거버넌스 구조로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권위주의 국가들이 선호하는, 국가가 통제하는 중앙집권화된 구조로 갈 것이지를 결정하는 분기점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미국은 중국이 국제표준계를 장악하고 있다며 견제를 시작했다. 이번 선거는 중국 주도적인 판을 깨려는 미국 의도가 다분히 작동한 결과다. 바이든 대통령과 국무부는 이미 작년 초부터 보그단-마틴 후보에 대한 지지를 확실하게 밝혀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소홀히 했던 다자주의기구에 대한 정책을 새로 세우고 글로벌 규칙이 만들어지는 국제표준화기구에 본격 관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런 흐름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국내적으로는 칩스(CHIPS) 법에 국립표준기술원(NIST)에 대한 예산을 대폭 늘리고 국제표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명시했다. 이는 민간 주도, 시장 중심을 기본으로 하는 기존 미국 표준정책과는 다른 흐름이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모든 양자·다자 글로벌 협의체에서 기술표준 문제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한미정상회담에서도 차세대이동통신, 오픈랜(Open RAN) 등 표준협력을 약속한 바 있고 쿼드와 같은 안보협의체에서도 핵심 신흥기술에 대한 표준화 협력을 확인했다. 작년 G7 정상회담에서는 ISO 인사 문제에 대해 공조하는 것도 언급됐다.

국제표준계 변화 흐름은 우리에게 기회다. ISO 회장 당선은 이미 우리가 적시에 기회를 포착하고 그 바람을 타고 있다는 좋은 징조지만 그 효과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먼저 기술표준 문제가 단지 산업계의 차원을 넘어서 지정학적 주제가 되었다는 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미국 국무부는 통합적 관점에서 ITU뿐만 아니라 ISO 선거도 예의 주시한 듯 하다. 보그단-마틴은 당선 소감에서 '전 정부 노력'에 감사를 표했다. 우리도 지난주 열린 '세계표준의 날'에서 '표준 선도국 진입 선언' 행사에 ISO, IEC뿐만 아니라 ITU를 관장하는 부처도 함께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나라는 기술선진국으로 규칙 제정의 장을 이끌어갈 역량이 있다.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참여 동기로 규칙 수용자에서 규칙 제정자로 되기 위해서 새로운 룰이 만들어지는 장에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기도 했다. 규칙 제정의 리더십은 기술역량 또는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성 확보가 관건이다. 미·중 대립 환경 속에서 유럽연합(EU), 호주, 영국, 일본, 인도 등도 글로벌 규칙 제정, 핵심기술 국제표준화 문제에 대해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여기에 개발도상국 참여와 협력을 추가하면 더욱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다. 이미 영국, 미국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거버넌스를 주도해 봤던 나라들은 핵심 디지털 기술 거버넌스 주도권 경쟁에서 개도국을 미래 'Digital Decider'라고 추켜세우며 논의의 장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표준인프라는 개발도상국의 발전에서 꼭 필요한 사회경제 기반이다. 우리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한-아세안 표준협력사업과 같은 사업을 이런 큰 그림에서 지속 추진하고 아프리카 등 개도국 표준인프라 구축에도 기여할 필요가 있다. ISO 같은 기구는 이를 위한 유용한 교두보가 될 수 있다. 국제표준계 풍향이 바뀌고 있다. 그 바람을 읽고 잘 타기 위한 돛을 달면 우리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희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mail protected]